선한 양심을 지닙시다

2019-10-06 336회

동문교회
031-701-0691 / 경기도성남시분당구야탑동 523번지
손세용 목사님

베드로전서 3장 8~17절

설교요약 :

"선한 양심을 지닙시다"
2019년 10월 6일 주일예배
베드로전서 3 : 8 - 17 ; 시편 107 : 8 - 9


한 농부가 애써 수박농사를 지어도 누군가 몰래 수박밭에 들어와 수박을 자꾸 따 가자, 그는 속상해하다가 묘안 하나를 떠올렸습니다. 주사기로 수박 한 통에 농약을 집어넣고는 수박밭 입구에 경고문을 붙였습니다. "이 수박밭의 수박 한 통에는 농약이 들어 있는데 주인만 알고 있음. 먹다가 죽어도 책임 안 짐. 주인 백" 그러자 수박도둑이 얼씬 안 하더니, 한 주일쯤 지나자 주인이 써 붙인 경고문 옆에 또 이런 경고문이 붙어있었습니다. "이 수박밭에 있는 수박 가운데 두 통에 농약이 들어 있음. 그 한 통은 주인이 알고, 다른 한 통은 도적이 앎. 도적 백" 이 농부는 수박을 한 통도 팔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악으로는 악을 이길 수가 없는 법입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양심이 마비되어 '죄'에 대해 무감각해져 마치, 마취주사를 맞고 치료받는 사람이 수술한 데가 터져 피가 철철 나는데도 통증을 못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치과치료하고 자장면 먹다가 혀를 깨물어 입에서 피가 나는데, 그것도 모르고 짜장면 맛이 찝찔한데 계속 먹었다고 하듯, 잘못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는 인류사에서 가장 악한 자로서 취급되어, 아무도 유다란 이름은 자식에게 지어주는 일조차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유다는 주님을 팔고 나서 주님이 정죄 당하자, 그는 '스스로 뉘우쳤다'고 했고, 또 은전 30냥을 되돌려줬으며, 그 돈을 받지 않자 던져놓고 나왔고, 그리고 너무 괴로워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고 했습니다. 요즘 양심 없는 범죄자나 합법적으로 완전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에 비하면 유다는 인간적인 면에서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소설 [개미]를 쓴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낭시대학 행동생물학연구소의 쥐에 대한 실험을 소개합니다. 쥐 여섯 마리를 수영장을 건너가 사료통에 가서 먹이를 가져오게 하자, 각기 역할이 분담되더랍니다. 곧 먹이를 가져와서 빼앗기는 쥐 두 마리, 먹이를 가져오지 않고 빼앗는 쥐가 두 마리, 먹이를 빼앗지도 뺏기지도 않는 쥐 한 마리, 헤엄도 못 치고 먹이를 뺏지도 못하는 쥐가 한 마리였습니다. 정확도를 높이려고 우리를 20개 만들어 실험하자, 독립적인 쥐 한 마리, 착취하는 쥐 두 마리, 착취당하는 쥐 두 마리, 무능한 쥐 한 마리로 동일했습니다. 위계질서의 형성과정을 파악하려고 착취집단만 모아 여섯 마리 단위로 실험하자, 서로 싸우다 두 마리는 빼앗고, 두 마리는 빼앗기고, 한 마리는 혼자 헤엄치고, 한 마리는 외톨이 됐습니다. 이제 착취당한 쥐를 여섯 마리 씩 모아 실험하니, 두 마리는 왕초가 되더랍니다. 이 실험 후에 쥐의 두개골을 열어보니, 놀라운 것은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은 쥐는 착취그룹이더랍니다.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피 착취집단의 불복종에 전전긍긍하는 업보였습니다. 강자와 약자는 늘 존재하지만, 악한 자가 결국 더 큰 고통 받습니다.


본문 16절은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양심'을 나타내는 영어 'conscience'는 라틴어로 '함께'라는 단어와, 진리나 진실을 '안다'는 단어가 결합된 합성어로 '내가 알고 있는 진리나 진실을 따라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양심'이란 '사회적 규범'과 '개인적 욕망' 사이에서 양자를 '함께 아는' 데서 성립됩니다. 한 설교가는 '양심'을 '영혼의 창'이라 했고, 도스토예프스키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신의 목소리'라 했으며, 임마누엘 칸트는 '저 하늘엔 무수한 별이 반짝이고 내 마음에는 양심의 도덕률이 빛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양심이 맑으면 영혼의 창으로 진리의 빛이 들어오기에, 믿음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양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다"(딤전1:19)며, 양심을 버리면 믿음도 파선하게 된다고 했고, 히브리서는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22)고 하여, 양심으로 자기 악을 깨달은 사람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선한 양심을 가져야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먼저는 우리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선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6). 아버지를 닮은 자가 자식인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선하신 하나님을 닮아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요즘은 유전자과학의 발달로, 머리카락 하나만 갖고서도 누구의 자손인지 알 수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은 유전자인 선한 양심이 있어야 하지, 만약 선한 양심은 약에 쓰려고 해도 없고, 오직 악한 마귀의 성품만 닮아서 악한 마음만 품는다면, 어떤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처할 수 있겠습니까?


박대선 목사님이 연세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하실 때 그 아들이 합격 점수에 약간 미달되어 연세대학에 낙방하였습니다. 그때 교수회에서 점수 차이도 큰 것이 아니고 총장의 아들이니 입학시키자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총장께 보고를 드렸습니다. 이때 박대선 총장님은 두말없이 총장 사직서를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완강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들을 떨어진 대로 놔두든지 내 사직서를 받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 결국 입학을 시키지 못하고 그 아들은 경희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연세대학교 캠퍼스 안의 총장 공관에서 살면서 경희대학교를 졸업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후 박대선 총장은 더욱 존경을 받고 감리교 감독까지 역임하셨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악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선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라고 했습니다. 흔히 악으로 악을 물리치려하지만, 악으로 악을 대하면, 악은 없어지지 않고, 그 악은 더욱 커집니다. 악을 다스릴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랑으로 그를 감싸는 길입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에서 선교할 때 중국인의 옷을 입고 강을 건너려고 배를 빌렸습니다. 그런데 허드슨이 배를 타려는데 마침 거만한 중국인 부자가 자기가 타야된다며 허드슨을 밀어젖혀 진흙탕에 속에 넘어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허드슨은 화를 내거나 욕을 하지 않고 웃으며 진흙 바닥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때 뱃사공이 그 부자에게 "이 배는 당신이 빌린 것이 아니라 이 분이 빌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분은 외국 분이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허드슨은 웃으며 그 사람에게 자기 배를 같이 타가자고 하니, 그 부자는 큰 충격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선한 양심으로 살아가기 위한 세 가지 대상을 말씀합니다. 첫째, 형제입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벧전3:8). 여기서 형제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먼저는 마음을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질적인 일치, 곧 동질성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라면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선 일치해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를 닮은 사람을 좋아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고향이 같거나 성이 같거나 항렬만 같아도 좋아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다른 점은 있지만, 그 근본에 있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같은 뿌리를 가졌고, 또 앞으로 궁극적인 운명이 하나가 될 것이기에 이런 마음으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대해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관용을, 그리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때로 우리는 방법의 문제로 불필요한 시비를 가리는 경우가 있으나, 그리스도인들 사이엔 '무엇을?', 그리고 '왜?'라는 문제에 대해선 절대로 의의가 없어야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해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 돼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여러 방법들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은 '동정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여기 '동정'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같이'라는 말과 '느낀다'는 두 개의 단어가 합성어로서 '같이 느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동정'이란 '이웃의 기쁨과 슬픔, 이웃의 모든 삶의 자리에 동참할 수 있는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진정 형제를 사랑하는 교제를 나누기 위해선 그들의 기쁨과 그들의 슬픔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은 차라리 쉬우나, 성공하여 웃는 자와 함께 웃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슬픔도 기쁨도 함께 나눌 수 있을 때, 이것이 진정한 '형제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그 마음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아닌, 긍휼과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형제의 어려움과 아픔을 생각하며, 내 아픔처럼 안타깝고 마음 아프게 생각해야합니다. 상대의 약점을 비판하기보다 상대방의 약점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실수 없이 완벽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서로 상처를 안고 살아가기에, 서로 '불쌍히 여기는 삶'의 태도가 없이는 성도의 교제가 언제든지 깨어질 수 있는 위험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사는 강의할 때나 길을 걸을 때나 환자를 진찰할 때나 늘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녔습니다. 겨울이면 따뜻한 물주머니를 주머니에 넣어 만지작거려서 손을 덥히곤 했습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선생님은 왜 늘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십니까?"하고 묻자, 의사는 웃음 띤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나의 환자들은 대부분 암 환자들입니다. 몸도 마음도 어찌 보면 추위를 많이 타지요. 따뜻한 의사의 손은 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늘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닙니다." 환자를 배려하는 의사의 사랑이 서늘해진 계절의 문턱에서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마음도 몸도 추운 누군가를 위해 따뜻한 손을 준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겸손하라'고 합니다. 형제와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선 겸손한 태도가 필수적입니다. '겸손'은 곧 섬기려는 종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과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 종의 형체로 낮아지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각광받고 칭찬 받으려는 사람은 많지만, 이름 없이 종노릇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선한 양심은 내가 종의 모습으로 낮아져서 이웃과 형제를 섬기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를 섬겨주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한 청년이 선교사를 지망하여 선교본부에서 인터뷰하였습니다. 그가 선교사로서 자격을 심사하던 선교 위원회는 아무래도 그가 선교사로서 부적격하다는 판정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선교사로 보내주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제가 선교사가 될 수 없다면 이미 선교사로 일하고 계시는 분들의 종노릇을 할 수 있도록 저를 보내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선교위원회 위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종노릇하는 심정으로 가라"고 그를 파송했습니다. 그가 곧 허드슨 테일러와 함께 중국 선교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말린 선교사입니다.


형제 다음은 우리를 핍박하는 원수입니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원수에게도 사랑으로 다가가야만 합니다. 본문은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9)고 했습니다. 여기서 먼저 핍박하는 자가 내게 행한 대로 똑같이 갚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갚는다'는 헬라어 '아포디돈테스'는 '당연히 갚아야 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당연히 악이나 욕으로 갚아도 될 만한 상황에서도 저주나 앙갚음하지 말라고 합니다. 엘리 바이젤은 나치 수용소에서 극심한 고생을 하며 독일인에 대한 원한에 사무쳤는데, 석방된 후 이런 말을 합니다. "증오심이 존재하는 곳이면 그 어디서나 미워하는 사람이 미움을 받는 사람보다 더 고통을 당한다."


다음으로 '도리어 복을 빌라'고 말씀합니다.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manlike, '인간적'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beast-like, '동물적'입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devil-like, '악마적'입니다. 그러나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Godlike, '하나님을 닮은' 성도의 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실 것입니까? 상대방이 선하면 나도 선하게 대하고, 상대방이 악하면 나도 악하게 굴고, 맞으면 때리고, 미워하면 나도 미워하는 것은 비인간적이요, 동물적입니다. 적어도 악을 선으로 갚을 줄 아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 영국 신사가 미국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풍성한 음식을 즐기며 가든파티를 열고 있는데, 마침 인디언 추장이 지나가다 몹시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 문간에서 주인을 불렀습니다. "배가 고프니 빵 좀 주세요." 그러나 주인은 거절합니다. "당신 같은 야만인에게 줄 빵은 없어!" "그러면 목마른데 물이라도 좀 주세요." "너 같은 놈한테 줄 물이 어디 있느냐?" 신사가 추장을 모독하자 추장은 섭섭한 마음으로 돌아섰습니다. 그 뒤 그 영국 신사가 사냥 나갔다가 길을 잃어 목이 마르고 지친 채 산을 헤매다 기진 하였습니다. 그때 그 인디언 추장이 지나가다 그를 보고 자기 집으로 데려다 물과 음식을 주어 살렸습니다. "당신 나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소?" 영국 신사가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인디언 추장이 말합니다."당신은 내게 물도 주지 않았으나, 나는 당신을 죽을 지경에서 살렸소. 마침내 나는 원수를 갚았소."


셋째, 우리 자신 곧, 우리 생명에 대해서도 선한 양심을 가져야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벧전3:10-11). 여기 '생명을 사랑하라'는 말은 '한 영혼을 사랑하라'는 뜻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생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소중한 인생을 자학하거나 자기 삶을 파괴해선 안됩니다. 이는 우리에게 귀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배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자기 생명을 아끼고, 내일에 대해서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듀크 대학의 사망원인 조사에서 암, 심장병, 에이즈가 1, 2, 3위를 차지했는데, 놀라운 것은 그들의 삶의 태도를 보니 그들은 남들보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용서하지 못하는 태도를 연구진은 '숨겨진 사망증후군'으로 이름 붙였습니다. 그것은 비만이나 마약보다도 무서운 병입니다. 우리는 자기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여, 스스로를 용납하는 선한 마음을 가져야만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선 먼저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쳐야 합니다. 주님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12:34)고 하셨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진찰할 때 "혀를 내밀어 보세요"라고 하는데, 환자의 입안을 보는 것만으로도 진단이 가능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말은 심중에 있는 것을 드러내기에 영적 건강도 혀로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천국의 시민은 '영광의 언어'를 사용하고, 지옥에 가는 사람은 '지옥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우리의 혀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자기 몸가짐도 깨끗하고 단정하게 하듯, 자기 입술도 악하거나 거짓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살인은 한 사람을 죽이지만, 험담은 험담을 늘어놓는 사람과, 듣는 사람과, 험담의 대상까지 세 사람을 죽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피해자가 되고 맙니다. 자신을 위해서도 혀를 금해야만 합니다.


다음으로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고 합니다. 처음엔 내가 악하지 않았지만, 악한 사람으로 인해 이를 갈다보면 얼마 후 나도 악해지게 됩니다. 이럴 때 함께 악에 빠지지 말고 악에서 떠나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라고 하십니다. 악마는 인간에게 악한 것을 보여주고 악을 체험하게 해서 그 사람으로 악에 빠지도록 하여 마음이 어두워지고, 믿음이 흔들리게 만듭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악한 세상에서 살더라도 악에 빠져선 안됩니다. 어떤 미움을 당하더라도 함께 미워해선 안되고, 어두워져선 안됩니다. 아무리 어둡고 악한 세상에 살더라도 내 마음은 항상 평안하고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악마는 악한 환경을 통해 사람들을 악해지도록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세상이야 거꾸로 가든 바로 가든, 나는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화평을 구하라'고 합니다. 주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마5:9)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이 복되기 위해서도 이웃과 화평해야 합니다. 고정원 씨는 2003년 무고한 시민 21명을 살해한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에게 어머니, 아내, 5대 독자 아들까지 잃고 자살까지 생각하며 미국여행까지 떠났지만 잠도 못 이루자 가해자를 용서해야만 자신이 피해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는 유영철을 면회하여 영치금까지 주며 오히려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그 때부터 그는 편히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내가 원수 갚기 위해 덫을 놓고 갖은 방법을 다 써보지만, 그렇게 하면 마지막에 그것이 내게로 돌아와, 결국 내가 당하게 되고 맙니다. 가만히 보면 못된 사람 버릇 고치려고 하다 자기가 더 나빠집니다. 잘못 바로잡고, 정의를 세운다고 하다 결국은 자기가 더 극단의 악에 빠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종말론적인 윤리입니다. 8절의 "마지막으로 말하노니"라는 말씀은 2장 18절부터 3장 7절 말씀에 대한 실천강령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또한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종말론적인 윤리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때에 대한 이런 징조를 말했습니다.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딤후3:3, 13).


세상은 점점 더 악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지켜보십니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벧전3:12). 여기서 '주의 눈'은 항상 자기 백성을 보호하고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이며(출2:25), '그의 귀'는 자기 백성의 간구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귀입니다(출3:7). 그리고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세상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한다면 선한 양심을 따라 살아야만 할 것입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겸손한 복종에 대하여 말합니다. "누가 그대를 편들고 누가 그대를 반대할 지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지 말라. 다만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생각하고, 하나님이 모든 일에 있어서 그대와 함께 하실 것인지에 대해 염려하라. 선한 양심을 지니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그대를 온전히 방어해주실 것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도우심 받는 사람에게 악을 행하여 해를 끼칠 수 없다. 만약 그대가 잠잠히 고난을 참으면, 틀림없이 주님의 도우심을 볼 것이다. 주께서는 그대를 구하실 적절한 시기와 방법을 알고 계시므로, 그대는 마땅히 자신을 하나님께 의탁해야 할 것이다." 선한 양심을 지니면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많은 자녀를 부양하던 어머니가 죽자, 그 가족을 돌봐야할 무거운 짐이 열일곱 살도 채 안 된 맏딸의 가냘픈 어깨 위에 지워졌는데, 그녀는 한마디 불평도 없이 가사를 맡아 동생들도 씻기고, 먹이고, 학교에 보냈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와 그녀를 칭찬하자, 그녀는 말합니다. "나는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는 것 뿐이야." "하지만 네가 꼭 해야한다는 법도 없지. 넌 이 집에서 뛰쳐나갈 수도 있었어." 친구의 말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그 말은 맞아, 하지만 내 내면에서 들리는 '해야 한다'는 말을 어떻게 외면하니?" 우리 내면의 '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그 의무를 받아들이거나 회피하는 것을 우리 자신에게 맡기십니다. 설령 그것이 크나큰 희생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양심에 따라 그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삶의 진정한 기쁨인 것을 깨닫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윌리엄 템플은 말했습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의하여 양심을 살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를 마음에 공급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의하여 상상을 정결케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을 여는 것이고, 하나님의 목적에 의지를 바치는 것이다." 우리는 가장 무서운 힘은 진리의 힘이요, 가장 강한 힘은 선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최대의 승리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이 위로하시며, 세상 끝날 까지 그 사람 편에서 도우실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승리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전서 3장 8~17절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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